“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야고보서 1장 2절
'파스퇴르(Pasteur)'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지요? 그는 프랑스의 화학자로서 오랜 세월 세균을 연구했는데, '살균(Pasteurization)'이라는 단어를 그 이름에서 따왔을 정도로 그 분야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런 놀라운 연구와 발견을 한 그의 몸은 반신불수라는 어려움을 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늘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나의 신체적 장애가 연구에 더욱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장애 뒤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창조주의 섭리와 깊은 뜻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미 그것은 역사를 통해 증명되었습니다. 조금 불편할 뿐 인생을 장애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마음을 고쳐먹고 승리의 표상처럼 역사에 빛나는 사람이 된 이들이 많습니다.
신체적으로 심한 장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 빛나는 발자국을 남긴 사람들을 생각하면 불리한 환경이나 신체적 조건을 탓하는 것은 아주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호메로스와 밀턴도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천하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은 등이 굽었습니다. 바다의 왕자 넬슨 제독도, 유럽을 휩쓴 나폴레옹도, 문호 셰익스피어도 다리 한쪽이 불편한 장애인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을 절반이나 쓴 사도 바울은 여러 병에 시달렸습니다. 학자들은 그가 간질환자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완전해진다”(고후 12:9)고 말하고 오히려 “내 약함을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경영하던 가죽공예점에서 송곳으로 자기 눈을 찔러 실명한 세 살 루이 브레이유는 ‘내 아이의 인생이 끝났다’고 낙망하던 아버지의 생각을 넘어 점자법을 개발해 수많은 시각장애인들의 용기를 북돋우고 희망이 됐습니다.
4선의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소아마비 장애인이었고, 종교개혁자 장 칼뱅은 걸어다니는 병원이라고 할 만큼 많은 병을 앓았습니다. 노벨상 수상자인 가가와 도요히코는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폐결핵으로 평생을 살았고, 세계적 명작 ‘실락원’의 저자인 존 밀턴은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소리가 차단돼 열심히 연구를 했다던 성서학자 윌리엄 바클레이는 청각장애인이었습니다. 귀머거리라고 조롱당하고 비난받던 악성 베토벤이 있는가 하면 한센병자와 일생을 함께했던 하와이의 성자 다미엔은 스스로 한센병자가 되어 그들을 영육간에 도우며 살았습니다.
누가 감히 이들을 장애인이라고 비난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신체나 정신의 한 부분이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인생까지 실패하거나 포기하라는 법이 있겠습니까. 어느 누가 감히 장애인의 꿈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합니까. 안타까운 마음에 숨죽이고 살아가는 장애인 부모나 가족의 마음을 보듬어주고 어루만져주어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닮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사람을 존귀하게 하기를 소망하며 장애인을 대하는 일에 장애를 가진 우리들이 그 장애를 극복함으로 모두가 행복하기를 기도합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살게 해 주세요.” “차라리 오늘이라도 나와 함께 데려가 주세요.” 장애 자녀를 둔 어느 엄마의 기도입니다. 뼈에 사무치도록 간절하게 울부짖는 엄마의 이 기도를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얼마나 마음이 쓰리고 아프면 이렇게 기도한단 말입니까 엄마의 이 기도는 절절한 모성애가 얼마나 귀하며 크고 위대한지 느끼게 해줍니다. 뿐만 아닙니다. 황량한 광야처럼 각박하고 삭막한 우리네 세상이 얼마나 매정하고 냉랭한지 여지없이 보여줍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 이 엄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헤아린다면, 장애인을 배려하는 따뜻한 사랑과 온정의 손길이 털끝만큼이라도 있다면 이 엄마가 이처럼 애타게 속 태우며 눈물짓지는 않을 텐데 말입니다.
몇 년 전에 뉴욕 데일리 뉴스에 감동적인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보워리란 마을에서 17세의 소년 마이크가 지붕 끝에 올라가 투신자살을 계획한 것입니다. 어머니는 도망쳤고 아버지는 심한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어린 소년이 너무 많은 문제와 걱정 속에서 몇 해를 고민하다가 자살을 계획한 것입니다. 이때 한 신사가 지붕으로 기어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소년에게 1시간30분 동안이나 말했습니다.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네 아버지가 되겠다” 이 친절한 사람은 윌리엄 폭스씨였는데 기어이 소년의 투신을 막고 정말 양자로 입양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지붕 저쪽 끝에서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아버지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자기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모든 판단을 맡기고 우리를 아들과 딸로 삼아주시겠다는 하나님의 품에 나를 위탁하는 것입니다. 그때 나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시119:165)
마가복음 2장 1- 5절에 중풍병자는 움직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네 사람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무리가 많아 예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이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그들은 체면이나 자존심, 수고로움을 버리고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믿음과 기도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장애와 난관을 뚫고 돌파합시다.
많은 청소년들이 상황의 장애를 두려워합니다. 어려운 현실을 피하려고만 합니다. 돈이 없어서, 어른들이 나빠서, 환경이 따라주지 않아서...라는 핑계만 대고 힘든 일은 해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처한 어렵고 힘든 환경은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장애를 통해 장애가 없을 때는 얻을 수 없는 가치 있고 빛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인생길을 가면서 우리는 크고 작은 장애물들을 만납니다. 이 장애물들은 우리를 넘어뜨리는 아픔을 주기도 합니다. 한 기자가 전도자 무디에게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가장 큰 장애가 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물음에 무디는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그 어떤 사람보다도 무디라는 작자 때문에 가장 골치를 썩고 있소.” 또한 잭 피아도 “내 인생을 돌이켜보니 많은 장애물을 만났었다. 그중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나였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나를 좌절케 하고 낙망케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인가요? 경제적인 것, 사회 환경, 질병, 모함, 오해…. 여러 가지 장애물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생각해보세요. 정말 나를 가장 힘들게 하고 낙심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있는지를 말입니다. 장애물이 나의 외부에 있는지 나의 내부에 있는지, 내 인생을 곰곰이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내 꿈, 내 시간, 내 목표, 내 사랑…. 그 모든 소중한 것들을 좌절시킨 장애물은, 정말 누구일까요? 세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미연방무역국(FTC)은 미국의 직장인들을 연구한 뒤 사람이 피로를 느끼고 마음이 가라앉는 것은 철분 부족 때문이 아니라 정신적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피곤하면 몸도 마음도 피곤하고 우울해집니다. 따라서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외적 조건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활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정신이 싱싱해지면 몸도 힘을 얻습니다. 정신적 재활을 위해서는 몇 가지 요건이 있습니다. 극복의 비결은 확실하고 구체적인 희망을 가질 것, 되도록 과거의 실수나 우울한 일에 오래 붙잡혀 있지 않을 것,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을 것, 자신의 사명을 구체적으로 깨달을 것,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낙관적으로 살 것 등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장애인들과 병자를 고쳐주시고 치료하셨습니다.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마15: 30-31)
예수님께로 나오세요. 여러분의 장애물을 주님께 맡기세요. 장애는 넘어가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낙심하지 않고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하나님을 주목하여 함께 바라봅시다.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나에게 주어지는 어려운 상황을 통해 더 큰 승리로 이끌어 주실 하나님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은혜로 되는 것이다. 개인적 차원의 믿음이 결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는 앞설 수 없다. 따라서 지적 장애인이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지적 장애인을 구원받지 못하는 대상으로 결정짓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세계밀알연합(총재:이재서 교수, 총신대)이 지난 5월 30일 오후 1시 총신대 종합관에서 개최한 ‘제10회 장애인신학 세미나’에 발제자로 참여한 정승원 교수(총신대)의 주장이다.
‘지적장애인의 구원은 가능한가’를 주제로 발표한 정승원 교수는 “전통적으로 기독교에서 가르쳤던 구원의 과정은 먼저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고, 그 전파된 복음을 들어야 하고, 그 다음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며 “하지만 전파된 복음의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 의미조차 깨닫지 못하는 지적장애인과 영아는 그 구원의 과정에서 제외될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즉, 지적장애인은 복음을 들어도 무슨 내용인지 모르기 때문에 복음을 믿는 것도 그 내용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전통적인 구원의 과정이 유일한 구원의 과정이라면 지적장애인과 영아에게는 구원받을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이에 대해 정 교수는 “이와 같은 주장은 소위 조직신학의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그리고 교회론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에 따르면 지적장애인의 구원 문제를 ‘신론’ 측면에서 접근할 경우 공평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서 지적장애인에게 어떤 기회도 주시지 않고 지옥으로 직행하도록 하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즉, 지적장애인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주장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는 말씀과 모순이 된다는 것. 그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이라면 분명 지적장애인을 위한 특별한 계획과 방법을 마련하셨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간론’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정 교수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됐다. 이는 신자뿐만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적용된다”며 “상대적으로 지적장애인이 지적 능력이 떨어지거나 신체적으로 부족하고, 성숙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만약 지적장애인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고 한다면 그를 ‘그 모양대로’ 창조된 식물들과 동물들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지적장애인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주장은 ‘기독론’에서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예수는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셨다.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하려는 목적으로 인성을 지니셨다. 만약 이러한 목적에 예외가 되는 인간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온전한 성육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원론’에서 접근할 때도 마찬가지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는 말씀을 지적장애인에게 예외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나니”(롬 3:23)라는 말씀에서도 지적장애인은 예외가 될 수 없다. 지적장애인도 죄인이며, 또한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차별없이 지적장애인에게도 적용된다.
‘교회론’에서도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정 교수는 “고전 12:22~23절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로 구성된다. 그러나 그 지체즈들 가운데 약하게 보이는 지체도 있고, 덜 귀히 여기는 지체도 있다고 말씀한다”며 “만약 지적장애인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가 될 수 없다. 물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된 지적장애인이라면 그 사람은 이미 구원을 받은 자라고 가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하나님은 ‘모든 자들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 2:4). 분명 하나님은 영아와 지적장애인들도 구원에 이르고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이 말씀은 인간의 판단 기준으로 구원을 논할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은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피력했다.
이어 “차별이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는 지적장애인에게도 차별이 없어야 한다. 모든 자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 지적장애인도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그 믿음이 결코 인간의 지적 동의나 이해를 조건으로 하는 믿음은 아니다”라고 역설했다.
특히 정 교수는 신명기 1장 39절 “또 너희가 사로잡히리라 하던 너희의 아이들과 당시에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너희의 자녀들도 그리로 들어갈 것이라 내가 그 땅을 그들에게 주어 산업이 되게 하리라”는 말씀을 근거로 지적장애인의 구원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는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아이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는 말씀이다. 물론 이 말씀이 영아들이 자동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분명 선악을 분별하는 지적 능력이 없는 아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따로 있음을 담고 있지는 않다”며 “같은 맥락으로 어떤 방법인지, 우리 지식으로는 알 수 없지만 분명 하나님은 선악을 분별할 지적 능력이 없는 영아들인아 지적 장애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따로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차별 없이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다”며 “그 ‘모든 자’라는 범주에 결코 지적 장애인이 제외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한편, 정승원 교수는 ‘하나님의 주권’, ‘죄’, ‘믿음’이란 주제들을 지적장애인의 구원과 연결해 지적장애인의 구원가능성에 대해 설명했다. 다음은 그 주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지적장애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서는 장차 있을 모든 일을 영원 전부터 그 자신이 뜻하신 바 가장 지혜롭게 거룩하신 계획에 의하여 자유롭게, 그리고 변치않게 예정해 놓으셨다”고 서술한다. 칼빈의 ‘기독교강요’에서도 “예정은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이며, 각 사람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을 그의 원대로 스스로 결정하시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단순히 신학자들의 사변적 교리가 아니라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사실이다. 엡 1:11은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라고 말씀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을 입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은 인간의 영적, 지적, 의지적, 심리적 차원과는 직접적 상관이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이러한 것은 구원에 대한 인간의 반응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적장애인의 지적 상태와 구원의 관계는 결정적 차원이 아닌 반응적 차원에서 논해야 한다. 그리고 반응적 차원은 구원을 무효화 시키거나 취소하는 차원이 아니며 반드시 사람들로부터 일정하고 보편적인 모습을 기대할 필요가 없는 차원이다.
특별히 구원에 있어서 바울이 강하게 비판한 것은 소위 ‘행위’다. 행위의 반대는 ‘은혜’다. 은혜는 인간의 그 무엇에도 개입되지 않는 하나님의 전적인 것으로부터 온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된다는 것은 인간의 지적 공로, 영적 공로, 행동적 공로 등이 구원에 개입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적장애인이 구원을 얻는 것은 전적으로 주권적 은혜로 말미암는 일이다. 단지 지적으로 모자라지만 봐준다는 식의 은혜가 아니라 인간의 어떤 요소도 개입되면 은혜가 되지 못한다는 차원에서의 은혜다. 지적 능력이 구원의 결정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지적장애인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성을 더 확실하게 부각시킨다.
각 사람이 자기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이 택하심을 받는데, 즉 지적 능력이나 도덕적 능력 차이로 사람을 구분할 수 있겠는가? 구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한 도전이요 하나님의 전적 은혜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할 수 있다.
지적장애인에 대한 구원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우리는 결코 지적장애인과 다른 사람을 먼저 구분한 다음, 구원 문제를 다뤄서는 안된다. 지적 능력은 구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데 이를 문제 삼는 것은 인간의 임의적인 추측에 불과하다.
구원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주권으로만 결정된다면 지적장애인의 구원도 하나님의 주권으로만 결정된다고 믿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다.
# 죄와 지적장애인
지적장애인이나 지적 문제가 없는 사람이나 죄 문제에 있어서는 동일한 입장에 처해 있다. 지적장애인이라고 해서 죄성이나 죄책이 없고, 지적 장애가 없다고 해서 자신의 어떤 능력을 통해 선을 행하거나 악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지적장애인은 어떻게 죄 문제를 해결하며,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지적 장애가 없는 사람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죄 문제도, 구원 문제도 인간 개인의 능력 밖의 일이다.
지적장애인의 구원 문제는 일찍 죽은 유아의 구원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둘 다 지적 능력이 결여돼 있다는 차원에서 같이 다룰 필요가 있다.
아더 핑크는 “아이들의 구원은 비밀에 속한 것이라고 하면서 만일 그들이 구원을 받았다면 그것이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고, 아들에 의해 구속받고, 성령에 의해 중생된 자들에 속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신자들의 자녀들은 효과적 은혜의 수혜자로 생각해야 한다. 그들 안에서 이미 효과적 은혜의 적용은 시작됐다. 또한 분별할 수 있는 나이 전에 죽은 아이들도 구원받았다고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선악을 구분하지 못하고 지적 능력이 결여된 아이들의 구원은 비밀에 속한 것이라는 말은 복음을 들은 후, 지적으로 이해하고 그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과정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적 능력이 없는 것으로 말미암아 구원에서 제외되지는 않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만약 구원을 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함과 성령의 중생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고 핑크와 카이퍼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 받는 것에도 유아나 지적장애인이 제외될 수 없고 구원 받는 방법에도 제외될 수 없다.
비록 비밀에 속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사실 다른 모든 사람들의 구원도 비밀스러운 것이다. 어차피 인간 개인의 능력에 따라 되는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초자연적인 능력에 따라 되기 때문이다.
# 믿음과 지적장애인
구원 혹은 칭의는 믿음으로 밀미암아 된다는 것이 개신교의 일반적인 전통이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니라”(롬 3:22). 분명히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의가 주어지며,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한다.
정승원 교수는 "우리의 지적 판단이나 이성적 판단으로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지적장애인에게도 믿음이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을 부인할 성경적 근거는 없다. 지적장애인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이 믿음은 결코 인간의 지적 동의나 이해를 조건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로마서 10장 17절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밀미암느니라”고 말씀한다. 말씀을 들으므로 믿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듣지 못하는 태아가 만약 태어나기 전에 어미 뱃속에서 죽는다면 자동적으로 지옥에 간다는 말이 된다.
이것을 과연 하나님의 공평하신 뜻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한 지적장애인에게 말씀을 듣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적장애인도 구원의 기회가 없이 자동적으로 지옥에 간다고 할 수 있을까?
분명 아닐 것이다. 태아나 영아, 지적장애인에게는 구원의 다른 길이 있을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삼위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역사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그렇기 때문에 들음과 믿음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로마서 10장 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고, 또한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식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태아, 영아, 지적장애인은 구원을 얻을 길이 차단됐다는 말씀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구절의 맥락을 면밀히 살펴보면 구원의 조건으로 인간 쪽의 개인적 믿음이나 지적 동의 차원의 시인을 말씀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로마서의 주제는 인간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행위(인간의 공로나 능력)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만약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인간의 공로나 능력에 관한 것이라면 로마서의 주제와 모순이 된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 개인의 믿음이 아니다. 우리의 지적 시인도 아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구원의 선택이 마치 인간의 동의에 의존하는 것처럼 주장한 것을 경고했다. 그리고 또 경고한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믿음에 의존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 가지는 지적 동의나 심리적 확신 역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한 믿음은 구원의 결정적 요소라기보다는 인간의 능력에 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이라는 것은 개인의 능력이나 동의가 아니다. 물론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 개인에게 주신 것이며 그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지만 그 믿음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난 것이다. 그렇다면 지적 능력이 없는 장애인이나 영아에게는 믿음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믿음은 개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자신의 지적 동의와 심리적 확신이 반드시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가진 믿음이 우리 개인과 상관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주어진 믿음이 우리의 지력이나 의지력, 영력으로 말미암아 발생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적 능력과 동의 능력이 없는 지적 장애인에게 이러한 믿음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를 의롭다 하는 것은 우리 개인의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믿음이다. 물론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에 우리 개인적 믿음이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므로 지적장애인에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 믿음이 흔히 생각하는 우리 개인의 지적 동의와 이해가 반드시 필요한 그런 믿음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개인의 지적 동의와 이해가 반드시 필요한 믿음이라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위배된다. 오히려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된다.
지적장애인이 구원을 얻는데 필요한 믿음은 지적 동의나 이해가 필요한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믿음이다. 이 믿음 역시 은혜다. 즉, 하나님께서 단동적으로 인간에게 주시는 믿음이다. 우리의 지적 판단이나 이성적 판단으로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지적장애인에게도 믿음이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을 부인할 성경적 근거는 없다.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은혜로 된다. 따라서 인간의 공로, 즉 지적 능력, 도덕적 능력, 신앙적 능력, 의지적 능력 등의 인간 행위는 결코 개입되지 않는다. 개인적 차원의 믿음이 결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앞설 수 없다.
심지어 복음에 대한 동의가 선택의 조건이 될 수 없다. 따라서 거룩, 예배, 선행, 열심, 지성, 의지 등의 행위는 성령의 이끌리심에 따른 그의 백성들의 구원의 결과적 모습이지 조건적 모습은 아니다.
따라서 인간의 상태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 구원의 필수 요건인 믿음은 개인의 지적 동의나 확신이 아니라 초자연적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지적장애인이 구원을 받았다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믿음이 그에게 있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지적장애인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거룩, 예배, 선행, 열심, 지성 등은 구원의 결과적 모습이지 조건적 모습이 아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지적장애인에게 결여돼 있다고 그에게 구원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 기뻐 받으신다. 오히려 장애가 없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구원의 결과적 모습들이 온전하지 못하고 일관적이지 않음을 볼 때, 지적장애인에게 그러한 결과적 모습이 없다는 사실을 큰 문제로 취급될 필요는 없다. 즉, 성도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모습이지만 지적정애인은 가질 수 없는 모습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출처: https://www.theosnlogos.com/550 [theos & logos]
한때 섬겼던 교회에 ‘소망부’라는 장애인 부서가 있다. 20-30대 미혼으로 다양한 친구들이 함께하는 공동체이다. 매주 휠체어에 온몸이 묶여 오는 친구도 있고, 같은 질문을 계속 반복하는 친구도 있다.
또 주일마다 필자의 설교에 다른 친구들보다 최고로 ‘리액션’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친구도 있고, 끊임없이 교사들의 연락처를 캐묻는 집요한 친구도 있다.
그 중에서도 좀 특이한 친구가 있었다. 교회에 부임한 이후로 한 번도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자매이다. 아무리 말을 걸고 질문을 해도 대답을 하지 않는, 아니 어쩌면 대답을 못하는(?) 친구이다. 지적장애인의 여러 유형 중 하나로 보인다.
그런데 어느 주일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부 사도신경 설교가 끝나고 2부 순서를 진행하는 교사가 설교 퀴즈를 내고 있었다. 그때 이 친구가 뭔가 대답을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앞으로 불려 나갔다. 진행하는 교사가 한 번 더 질문을 들려줬다.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어디에 못 박히셨을까요? 오늘은 우리 지수가 과연 말을 할지 지켜보겠습니다.”
우리 친구들과 교사들은 웃음이 ‘빵’ 터졌다. 이번에도 선생님이 대신 대답해 줄 거라고 다들 예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말을 내뱉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진행하는 교사도 지수가 말을 내뱉도록 힘써 돕고 있었다. 그 순간 지수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십… 십자가!”
모두들 잘못 들은 줄 알고 숨을 죽이고서 또 다시 귀를 기울였다.
“십자가!”
역시 이 친구가 직접 말을 내뱉고 있었다. 나도 내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지수의 입에서 또렷한 발음으로 “십자가!”라는 말이 들렸다. 진행하는 교사 말로는 ‘10년 만에’ 드디어 지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 순간 나는 소망부의 구호가 떠올랐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소망부!”
부임한 후로 한 번도 바꾸지 않은 소망부 구호이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소망부 친구들이 되자는 간절한 외침이다!
그런데 우리 친구들에게는 또 하나의 ‘십자가’가 있다. 그들의 몸에 지닌 장애라는 ‘십자가’이다. 비장애들인은 절대 가질 수 없는 십자가이다. 매주 구호를 외칠 때마다 십자가의 그런 이중적인 의미가 동시에 떠올라서, 참으로 기분이 묘했다. 그런데 우리 친구들은 십자가의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자랑하는 듯했다.
아무튼 처음으로 내뱉은 지수의 말, “십자가!”가 한동안 하루종일 나의 뇌리를 스치고 있었다. 과연 나도 말을 처음으로 다시 하게 된다면, 가장 먼저 외치고 싶은 그 한 마디가 무엇일까? 나중에 주님을 직접 대면했을 때 “율이 네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그 한 마디를 들려줄래?”라고 물으신다면, 과연 나는 “십자가!”를 외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까?
필자는 소망부 친구들과 매주 예배를 드리면서 참 많은 것을 배웠다. 주께서 이들의 마음 속에 십자가를 살아 있는 신앙고백으로 새겨 두신 사실을 자주 깨닫는다. 성경과 교리 지식은 비장애인보다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 친구들의 존재 내면에 심겨 있는 ‘신지식(cognitio Dei)’이 참으로 심오함을 자주 깨닫는다.
최근 필자의 사무실에 그때 드 소망부가 단체로 방문했을 때 정말 감격스러웠다. 사임하고 떠나간 교역자를 기억하고 아마 십자가의 사랑을 못 잊어 찾아온 거라고 믿었다.
10평 남짓한 공간에 20명의 친구들과 교사들이 비좁게 앉아서 이전의 구호를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천국 가족의 모습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그리고 다른 어떤 모습을 가진 자라도 오직 주님의 십자가 사랑 하나로 함께하는 그곳이 바로 천국이다! 정말로 십자가를 자랑하는 교회 공동체가 심히 그리운 요즘이다.
123 Fifth Avenue, NY 10160, New York, USA | Phone: 800-123-456 | Email: mountainadventure@info.com